움직이는, 행(行)
다생소활에서 흔히 말하는 '몸명상"이란 게 있다.
"몸명상"을 단순히, 몸을 움직임으로써 깊은 삼매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몸명상을 권하는 이유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무 익숙해서 인식 조차 할 수 없는, 그 정도의 깊디 깊은 자신의 틀까지 깨어보라는데 있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힘에 겨워 견디기 힘든,
때로는 열악하기 조차한 상황을 함께 지내고 견뎌봄으로써
자신의 두터운 껍질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라는 뜻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보여지는 권위, 학벌, 지위, 가문, 금력등으로 인해 습이 되어버린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생각으로 하는 금식'으로써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분명코 있기 때문이다.
참된 선지식은 민중 속에, 시장 속에, 세상 속에 머문다.
문득문득 혼자 중얼거린다.
"***는 왜 몸명상을 하지 않을까."
"000는 꼭 이것을 해야만 하는데..."
몸명상이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단순히 일손을 하나라도 덜고자 하는 것일 뿐일 것일까. ㅉㅉㅉ...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사찰을 지나다 보면 뒤짐을 지고 경내의 일거리들을 구경하면서
구업만 쌓고 있는 머리깍은 이들을 자주 본다.
채마밭을 일구고 울력을 하게 하였던 과거 선지식들의 깊은 뜻을
대중들이 다 헤아리긴 어렵다 하더라도,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스친다.
평등과 영혼의 무게를 알아가고자 하는 이들 중에
그들의 의식이 좁은 현생의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스스로가 벗어나게 될 것이 두려워 움츠리고 있다면
그들의 행보, 이 모두는 하나같이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과감히 벗어라,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옷을.
그리고 또 입어라, 이번 생에 주어진 삶의 무늬들을.
덕명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