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전달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한 후 때로는 그 대화 내용을 적어보라고 하고
어떤 때는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전달해 보게도 한다.
옮겨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해보라고 하면 정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적어 달라고 했을 때, 말했을 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둔갑되어져 있거나
사용하지도 않은 단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는 보는 이나 듣는 모두가 상당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일들을 겪어보면서 언어란 것에, 이 ‘말’이란 것의 한계를 새삼 느끼게 된다.
때로는 치사하기까지 하니까.....
언어, 말과 뜻의 전달이 이토록 어려운 것이란 것은 이미 나온 졸서들에 적은 바가 있다.
그래서 채널링이나 기타 여러 형태의 메시지 전달에 오류가 많은 것임을 이미 지적했었다.
에너지(체)에 대한 공부를 새로이 해가고 있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화 중에 자신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 에너지(체)가 어떤 것인지,
혹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어떤 에너지(체)가 작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따라
들리는 말조차 그 의미가 다르게 들리는 것이니 어찌 언어의 전달이란 것이 난해하다 하지 않을 것인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이 들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뜻을 말할 때가 어렵잖게 있지 않던가.
“정화”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 다생소활이다.
“정화”에는 이러한 총체적 문제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정화를 해야 하는 일에는 개별적인 것도 있지만 서로 고리를 엮고 있어
단편적으로 생각해서는 풀어지지 않는 일도 있다.
어떤 대화를 하거나 이야기를 들을 때, 생각해 보자.
지금의 내 상태는 어떠한가.
나에게 어떤 에너지체가 작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떠한 것이 나의 ‘감정’이라고 하며 스스로를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떤 기분의 상태 혹은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지.
이도 저도 아닌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정말 좋은 것이다.
아무런 편견과 이미 자리잡은 선입견이 없는 상태라면 얼마나 좋을까.
편견이나 선입견 혹은 그 당시의 내 감정이 참으로 “나”일까.
지금까지 다생소활의 홈페이지를 보신 분들이거나 책을 보신 분들이시라면
“No~~~" 하며 고개를 가로 저으실 것이다.
남의 감정이다.
오롯한 ‘나’가 아닌 다른 정체모를 에너지들에 의해 ‘나’는 간 곳 없어져 버린 꼴이다.
실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그게 “참 자아”인 줄 알고 있으며
나가 아닐 수 있다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 치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에너지(체)들에 놀아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그런 상태에서 감정이 섞여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판단’, ‘분별’이라는 난해하고 오묘한 경계에 서 있는 단어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다는 것...
이러한 말의 뜻이나 상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추측, 건너뛰기, 혼자서 머리 굴리기...등등의 상태와 마음가짐에서는
올바른 대화, 정확한 이야기 나눔은 별무소득일 것 같다.
그래서 ‘말’이란 것이 가장 시시한 것이며 가장 저급한 것임을 알고들 있다.
그래서 그렇게 시시해져도 하찮아져도 살아갈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지도 모르겠다.
가끔 회원들과의 대화에서 하던 말이다.
(여러 사람들이 있노라면 자칫 생길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눈 것이므로 달리 확대 해석하시지 마시압.)
‘고자질’과 ‘사실의 보고’에 대해 사뭇 혼동스러워 할 때가 있다.
이는 두 단어의 경계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에 있어 상황의 보고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이를 보고하는 일이 “고자질”은 아닌 것이다.
칭찬거리를 두고 아무도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당사자는 “왜 고자질하지 않느냐”고 할 것인가. “보고를 안 해주냐”고 할 것인가.
‘고자질’이란 것은 이미 그 단어가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고자 할 때
그것은 ‘고자질’과는 이미 거리가 먼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잘못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 당시의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냉철히 바라본 후에 스스로 바로 잡아,
객관화 시킨 다음에 ‘보고’를 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마음을 고쳐 나가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거리낌이 없는 때는 이러한 용어 조차도 사용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쓰게 되는 용어일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잘못을 하게 될까봐 스스로 삼가는 마음에서 쓰여질 것이지만
이는 기존의 세상에서 이로 인한 상처가 있다거나 들은 바가 있어 그것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개인의 감정이 섞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잘못’이란 느낌이 없고 당당할 때는,
그야말로 공과 사가 정확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 때는 그런 말이 저절로 쓰여지지 않을 것이다.
대상과 대화에 있어서 개인의 감정이나 분별이 앞서지 않고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
쉬워 보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경지이다.
덕명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