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가수 뺨 친다' 혹은 '가수 저리가라다'라면서
그 사람의 '가수스러움'에 대해 말합니다.
화가가 아니면서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이,
원예가가 아니면서 화초를 아주 잘 가꾸는 이,
건축가가 아니면서 집을 아주 잘 짓는 이...
이런 이들에 대해서도 '스러움'을 가지고 평하게 됩니다.
어렵지만 성실한 삶을 살면서 주변에 빛이 되는
서민들을 보며 우린 진정한 성직자라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소활스러움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본론으로 들어가려니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래서 살짝 은유로 빗대어야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온라인 헥소미아를 클릭했습니다.
물에 대한 글이 보이네요. 매일 보았던 글귀.
그것이 오늘 둔탁하게 제 가슴을 타격합니다.
'물처럼
나와 다른
세상의 모두를 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빛편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이것을 보는 이들이 그리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나.
흘러나오는 정제된 아름다운 음악에 그냥 취하면서
이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눴으며 하는 생각만 했던 나.
그런 '나'는
물처럼
나와 다른
세상의 모두를 얼만큼 포용하는지.
나에게 세상의'모두'는 얼마만한 크기의 '모두'인지.
얼마만한 분류를 포함하는 '모두'인지.
바닷가에서 조약돌 골라내듯이
골라낸 조약돌만 포용하고 있는지
포용할 수 없는 절대기준을 가진 채
그것 이외의 다른 것만 포용하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물스러움이던가.
물이 되기 위해 현재 정화에 힘쓴다지만
아직 모자란 나의 현재를 너무 많이 용인하면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관대함의 균형을 맞추는
줄타기라는 '중용'이라는 단어가 이럴 땐
늘 올라오지만
오늘은 중용도 싫고 줄타기도 싫고
그냥 바로 '물'이 되고픈 생각만 듭니다.
앞으로 다가올 희망이 아닌
지금 여기서 바로 '물'이었으면.
.
.
소활스러웠으면.
그러나 압니다.
다시 저는 중용이라는 단어를 쓰며
그 단어에 살짝 고마움의 윙크 한번 보내고
또 다시 스스로를 토닥거리기도 하고
칼날을 들이대기도 하면서
소활님들과 많이 웃으며 수다 떨며
하루를 보낼 것임을.
여유와 긴장의 배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결코 극으로 갈 수 없음을.
나 자신은 그러는 중에 천천히 액체화되어감을.
다시 제 자리입니다. ^^